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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Details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69.1 (2016)
Edited by Ian McFarland
ISSN: 0036-9306
Publication Type: Journal
Imprint: Cambridge
Language: English

Abstract

The debate regarding the meaning of πίστις Χριστοῦ in the Pauline epistles continues and is important because of its implications for theology. In the phrase there is a double ambiguity, which touches not only the significance of the genitive, but also the meaning of πίστις. A brief look at some key texts in Romans suggests that the phrase refers primarily to the faith/faithfulness of Christ, but that this is also something shared by those who are ‘in Christ’. Through Christ God has done what the law could not do, enabling men and women to become his children, and so share not only in Christ’s faith but in what he is. The phrase thus represents the ‘delicate balance between human behaviour and divine grace’ that characterises Paul’s soteriology.

Keywords: Christ, exegesis, faith, Paul, Romans.

Article Description

  • 본 아티클은 바울신학에 있어서 가지는 그 의미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지금껏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πίστις Χριστοῦ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의 해석에 대해서 다룬다. 이 문구가 가지는 모호함은 속격 해석이 가지는 이중성 뿐만 아니라, πίστις의 의미 때문이기도 하다.
  • 저자는 이 문구의 해석이, 단순한 문법적인 접근으로만으는 풀릴 수 없는 문제임을 지적한 후에, 결국은 이것의 해석이 해석자의 신학적인 프레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들은 이것을 목적격으로 해석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 해석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 자신이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의 신성을 침해하는 것으로 여겼기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신성의 프레임을 가지고 이 구절을 해석했다. 그 이후로 개신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루터로부터 나왔는데, 그는 복음의 핵심을 “이신칭의”로 보았기 때문에, 이 구절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해석했고,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주장했다.
  • 이 전통적인 해석에 대한 현대신학자들의 반발은 1891년, 하우스라이터(Haussleiter)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이것을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에도 하나님 안에 머물기를 원했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보았다. 다이스만은 이 문구를 특별한 유형의 속격이라고 제안하면서, 이것을 유대적 속격(genitive of fellowship) 혹은 신비적 속격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유대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1950년대에 허버트(A.G. Hebert)와 토랜스(T.F. Torrance)는 헬라어 피스티스를 히브리어 אֱמוּנָה의 동의어로 보았기때문에, 이 문구를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신실함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나타난 것으로 해석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롬 3:22)”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통하여”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던, 바르트의 해석에 기초한 것이다.
  • 20세기의 말에 이르러, 이 문구를 주격으로 해석하는 조지 하워드나 루크 티모디 존슨에 의하여 이 논쟁의 중심은 미국으로 넘어왔는데, 보다 본격화 시킨 것은 바로 갈 3:1-4:11의 내러티브 구조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리처드 헤이스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 그래서 1991년의 SBL학회에서는 이에 대한 논란이 심화되었고, 제임스 던은 헤이스에 강하게 반발하며, 전통적인 해석을 고수하였다.
  • 저자는 주격적 해석에 보다 우호적인 현대적 해석의 원인을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한다. 1)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의의 강조, 2) 바울의 주장을 개인적 구원보다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보는 해석, 3) 바울 신학의 중심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다는 주장의 확대, 4) 그리스도의 인성이 바울의 기독론과 구원론 둘다에 있어 본질적이라는 인식.
  • 이렇게 이 논쟁의 역사를 정리한 후에, 저자는 로마서 본문을 중심으로 이 문구의 뜻을 살피는데, 특히 롬 1:17에 인용된 하박국 2:4의 LXX 본문에 나오는 믿음이 하나님의 신실함임을 지적하며, 이 구절에서의 믿음도 유사한 방식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음을 밝히고, 로마서에서는 믿음과 순종이 비숫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도 지적한다. 또 3:21-6에 대한 주해를 중심으로, 4:24-5, 5:6-11등의 문맥을 고려하여 기본적으로 이 문구는, 주격으로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믿음/신실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공유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구를 통해서 인간적인 행위(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공유하는 신자들의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의도적으로 균형을 이루게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 동시에 저자는그리스도의 믿음은 그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공유되는 것이므로, 루터의 해석이 틀린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저자는 이 문구가 그리스도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냐, 아니면 신자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둘 다”가 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요약 및 번역
김형태 [Ph.D Student at Durham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