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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Details

Paul’s Place in the Story: N. T. Wright’s Vision of Paul
Author: Thomas R. Schreiner
Source: Journal for the Study of Paul and his Letters, Volume 4, Issue 1, pages 1-26
Subjects: Biblical Studies
Publication Year : 2014
ISSN : 2159-2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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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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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first summarizes contribution, including the historical context of Paul’s day, world view (focusing on symbol and praxis), his theology (centering on monotheism, election, and eschatology), and the application of theology to his context. An evaluation of Wright’s contribution follows, in which both the strengths and weaknesses of this massive work are set forth. Wright’s overarching synthesis of thought in the culture of his day stands out, but questions are also raised on a few issues, particularly construal of justification.

Key Words: world view, story, philosophy, religion, imperial cult, boundary markers, Torah, Israel, monotheism, election, eschatology, justification, eth- ics, exile, supersessionism, Israel

Article Description

[Schreiner가 Wright의 책을 아주 명료하게 요약 정리해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 번역 및 요약은 책에 대한 Schreiner의 평가만 다루고 있으니, 요약문을 보고 싶으시다면 해당 아티클을 구입하셔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로마 제국
Wright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는 가르침을 통해, 로마 제국에서 행해지던 ‘황제 숭배’에 대항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을 통해 로마의 황제 숭배에 대항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바울 서신의 독자들에게는 ‘황제 숭배’보다,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만났던 ‘다른 신들'(other gods)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2.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임하심
Wright는 바울의 고등 기독론이 부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시온에 임하신다는 믿음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울의 기독론이 예수께서 그의 성전으로 임하신다는 사실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바울에게는 분명 성전 신학이 있지만, 그의 서신에서 명확히 언급하는 부분을 찾기 어렵다. 바울은 성령을 통해 그의 백성에게 임하신다고 말하지만, 그 언급이 그리스도께서 성전에 임하신다는 것을 말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

3. 이야기 (Story)
Wright가 말하는 큰 그림과 이야기에 대한 강조는 분명히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단점이 될 수도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Wright는 바울이 쓴 저작들이 어떤 장르인지 간과하고 있다. 바울이 쓴 서신들은 어떤 상황에 대한 답변형식으로 작성한 것이므로 상황 문서의 성격을 가진다. Wright의 네러티브적 접근은 바울의 서신이 가지고 있는 설명문으로서의 특징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4.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
로마서 11:26에서 말하는 모든 이스라엘의 구원이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모두 포함한다고 보는 Wright의 주장에 동조하기 힘들다. 특히 이스라엘이 지칭하는 대상이 11:25과 26절 이 한 절 만에 바뀐다는 그 어떤 근거도 찾기 힘들다. 또한, 11장 26절 이후 두 절 만에 바울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선택으로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11:28).

5. 그리스도의 재림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지만, Wright는 그의 책에서 이상하게도 이 부분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

6. 이스라엘의 역할
Wright가 말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약속이 이스라엘에 주어졌다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Wright는 이스라엘이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언급하면서 너무 앞서 나가는 경향이 있다. 비록 바울이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빛으로 말하고 있지만, 이것이 이스라엘이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주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으로 지명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죄가 아니라, 그들의 소명을 이행하는 데 실패한 것이라고 보는 Wright의 의견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그들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죄의 문제라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또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죄가 한 곳, 즉 이스라엘에 모이고 그 죄를 이스라엘은 예수님께 전가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 해석이다.

7. 바울의 중심 사상: 화해와 연합
Wright가 비록 ‘핵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교회의 하나 됨’, ‘하나님과의 화해’, ‘인간 사이의 화해’를 바울의 사상에 있어서 핵심이라고 보는 것 같다. 분명히 이 주제는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하다. Wright는 바울의 사상에서 부분적인 주제를, 자신의 관점으로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Wright가 주장하는 것처럼 화해와 연합이 바울의 사상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더욱 깊은 논증이 필요하다.

8. 칭의
(1) Wright는 ‘칭의’가 ‘법정 개념’이며, ‘변혁’이나 ‘삶의 변화’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고 옭게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이 개념을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 그리고 우리의 ‘언약적 회원권’의 문제로 본다. 다시 말해, Wright는 ‘칭의’가 일차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이자 언약의 구성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Wright는 범주(Category)를 잘못 잡는 실수를 범했다고 본다. Wright가 말하는 칭의 개념은 도움은 되지만 한편으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2) Wright는 칭의가 ‘창조’와 ‘언약’이라는 두 개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옭게 주장한다. 칭의와 언약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 말이 칭의 그 자체가 언약적 신실성이나 언약적 멤버십과 동일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꼭 필요하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의는 그분의 언약적 약속을 ‘성취’하신다.”
(3) Wright는 ‘의롭게 하다’와 ‘구원’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부분에서 Wright는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Wright는 칭의를 교회론적 범주에 넣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칭의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한 사람이 언약적 구성원 즉 그리스도 예수가 세우신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설득력이 없다. ‘칭의’와 ‘구원’은 동일하지 않다는 그의 주장은 분명 옳다. 하지만 그 두 개념이 지칭하는 대상이 동일하다는 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구원은 한 사람이 장차 올 종말의 진노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이다. 동시에 칭의는 한 사람이 마지막 날에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구원과 칭의는 ‘구원론적 실체’이다. 다시 말해 칭의는 ‘교회론’이 아닌 ‘구원론’의 범주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4) Wright는 약속의 성취가 소위 옛 관점이 말하는 것처럼 ‘천상의 나라’가 아니라 ‘새 창조’라고 말한다. 하지만 옛 관점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학자는 우리의 미래가 ‘변혁될 새 창조’라는 사실에 이미 동의하고 있다. Wright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장차 맞이할 새 창조에 들어가기 위해 종말의 심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간은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직면해야 한다. Wright는 그의 책에서 이 부분을 충분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5) 신자의 개인 확신에 대한 문제도 중요하다. Wright는 칭의가 일종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옳게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최종 심판은 ‘행위’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만약 최종 심판이 행위에 근거한다면 누가 종말에 자신이 의롭게 되었다고 확실할 수 있을까? 나는 다음과 같이 정정하고 싶다. “행함은 칭의의 열매이자 증거이다.”
(6) 최후 심판과 확신의 문제는 ‘전가 사상’과 연결된다. 여기서 핵심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시느냐의 문제이며, 우리의 의가 우리 안이 아닌 밖에 있으며,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로마서 5:12-19과 고린도후서 5:21은 이를 분명히 증거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수여받게 된 것이다.
(7) Wright는 여전히 E. P. Sander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시의 유대주의가 다양성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많은 증거가 발견되었다. 어떤 유대인들은 분명 율법주의적이었다. 이는 누가복음 18:9-14절만 봐도 명백히 드러난다. 율법주의는 유대인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문제다. 이것이 로마서 4장이 분명히 증거하는 바이며, 이는 Wright의 해석보다 설득력 있다. 배타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boundary marker는 분명 문제였다. 새관점은 이 부분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을 줬다. 하지만 Wright는 단지 그 측면만이 중요했다는 Sanders의 의견을 아직 수정하지 않고 있다. 많은 증거가 있음에도 말이다. 바울은 분명 율법주의를 비판했다. 이런 의미에서 Wright는 언약 백성들 사이의 ‘수평적’ 관점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수직적’ 관점을 정당히 보는 데 실패했다.